나는 가끔 들말 할머니가 그리우면 엄마를 부추겨 들말 할머니 이야기를 듣는다.
"엄마 들말 할머니 돌아가셨을까? 그랬것제?"
딸년의 느닷없는 물음에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이 들말 할머니에 대한 회상을 나직하게 조곤조곤 회상을 해내시는거였다.
엄마는 들말 할머니네 댁에 대하여 이렇게 회상하신다.
"해평에서 잡은 고기 함지들을 지고, 이고 해평 사람들이 팔러오면 거진 들말댁에서 샀더니라. 어찌나 푸짐하게 물건을 샀는지 쏵 떨어서 사는 통에 해평에서 물괴기 팔러 온 사람들이 그 댁을 최고로 쳤지야……. 머슴이 예닐곱에 식모가 두엇에 그 사람들 먹을거리가 언제나 풍족해서 누구라도 그 집에서 머슴 살라고 했더니라. 인심이 족하고 넘쳤지야."
어린 시절 집안 먼 친척뻘이 된다는 말만 들었다.
허긴, 같은 성씨인 박가 성이니 이리 보나 저리 보나 친척 속에 있던 시대가 그때였으니.
들말 할머니네 집 생김새는 어린 내 눈에 그야말로 대궐 같아 보였고 워낙 부자라는 평판 속에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큰 대문을 넘어서서 또 다른 대문을 밀고 들어서야 안채에 들어가는 큰 규모의 집에다 마당 가에는 몇십 년은 족히 되었을 유자나무가 고목처럼 서 있어 가을이면 어찌나 조랑조랑 노랗던지 들말 할머니를 연상하면 언제나 그 유자나무가 떠 오른곤 했다.
들말 할머니는 가을이 되어 유자가 익으면 유자를 따 두었다가 유자 몇 알씩을 손에 쥐어주곤 하셨는데 지금도 유자를 대하면 늘상 들말 할머니에 대한 인자함부터 떠올라 가슴이 따스해진다.
들말 할머니는 우리 엄마를 질부라고 부르셨다. 언제나 은은하게 인자하신 품새를 지니셨던 들말할머니의 택호는 어린것으로는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들말이란 곳에서 박실로 시집을 오셨기에 호칭이 들말댁이라 붙었나보다 짐작만 했었다. 우리 엄마 택호가 오세댁이었던 것처럼.
들말 할머니네 심부름 가는 길이 어린 시절 가장 즐거웠고 멀다면 먼 길이 결코 멀지 않았다. 어쩌다 심부름 가는 길이 즐거웠던 것은 심부름을 간 어린 나를 단 한 번도 실망시키지 않고 이것저것 먹을거리를 챙겨주셨고 꼭 도화지며 공책을 품에 안겨주시면서 공부 잘하라는 말을 잊지 않으셨기 때문일 것이다.
언제나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어째 그리도 야무지냐, 공부도 잘하고, 인사도 잘하고, 어디 나무랄데가 있어야제. 글고 느그 엄마 같은 사람이 세상 천지간에 어디에 있것냐" 이렇게 칭찬을 아끼시지 않으셨다.
물론 나만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오빠부터 우리 형제 모두를 모둘쳐서 칭찬하시는 소리였다, 이런 칭찬을 먹고 자란 내 유년의 뜰은 가을 국화가 흐드러지게 피어난 벅찬 모습으로 자라게 해 주었다.
그렇게 좋았던 들말 할머니네 운봉이란 언니가 있었다.
나는 운봉언니의 얼굴을 본 적이 없지만 운봉언니가 들말 할머니네 안채 뒷방에 갇혀 있었고 가끔 괴성을 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엄마의 말을 빌리자면 들말 할머니네는 참으로 큰 대가집이었고 워낙 잘 살아서 머슴이 예닐곱에 식모까지 치자면 부리는 사람만 열은 족히 넘었다고 했다.
그런데 들말 양반이 항상 씨부렁거리고 다니는 게 흠이라고 했다.
논에를 가나 어디를 갈지라도 혼자서 알 수 없는 말을 씨부렁거렸다는 것이다.
지금사 생각해 보면 들말 양반은 빙의 기운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마도 그런 아버지의 기운이 운봉언니에게 간 것일까?
운봉언니는 도회지 광주에 가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근처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우리 오빠와 큰언니를 너무 예뻐해서 자기가 데려다 공부시키겠다면서 그리도 예뻐했다는 말을 엄마는 잊지 않고 하시는 걸 보면 운봉언니에 대해 많이 안타까우셨던 모양이다.
들말 할머니에 대해서 지금 돌아가셨을 거라고 아들이 없이 딸만 여섯이었는데 어떻게 잘 돌아가셨는지 모르겠다고 들말 할머니에 대한 회한을 한숨으로 나타내신다.
운봉언니는 참으로 예뻤고 똑똑했다고 한다.
그런 언니가 알 수 없는 기괴한 웃음으로 온 집안을 삭막하게 만들고 날이 궂을 참이면 소름 돋을 괴성을 질러댈 때면 들말 할머니는 "저것이 왜 또 저런다냐." 하시면서 못내 안절부절 어찌할 바를 몰라 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운봉언니에게 힘센 남자의 영혼이 빙의되어 인격체가 섞이므로 소위 미친 것이 된 것인데 그 당시 그런 내용에 대해 알 턱이 없는 사람들은 그저 쉬쉬하면서 미쳤다고만 했던 기억이 난다.
하도 힘이 세서 방이며 벽을 모조리 뜯어 버리는 통에 쇠사슬로 발을 채우고 손을 채워 놓았다고 했다.
엄마는 운봉언니 이야기만 나오면 눈시울을 붉게 물들이며 그 상황을 아프게 설명하시곤 한다.
우리 엄마한테 참으로 살갑게 대해 주시면서 우리집 자식들 그 누구에게라도 따뜻한 말과 어루만짐을 아끼지 않으셨던 들말 할머니.
유자가 익어가면 들말 할머니가 생각나고 단 한 번도 지나치는 법 없이 유자 속에 들말 할머니가 떠 오른다. 더불어 아주 예쁘고 총명했다는 운봉언니까지.
잘 익은 칭찬과 쓰다듬음으로 내 유년 시절을 흐드러진 가을 국화 무리처럼 벅차고 흐뭇함으로 살아내게 해 주신 들말 할머니가 그리운 아침이다.
따뜻한 유자차 한잔과 더불어. (2006년 작)
[秀重 박하경 수필가 프로필]
출생: 전남 보성. 시인, 수필가. 소설가
한일신학교 상담심리학 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경희사이버대학사회복지, 노인복지학 전공
월간 모던포엠 수필 등단(2004).월간 문학바탕 시 등단(2007).한국문인협회,한국소설가협회와 경기광주문인협회 회원, 현대문학사조 부회장, 지필문학 부회장, 미당문학 이사, 현대문학사조 편집위원. 종자와 시인 박물관 자문위원. 제2회 잡지 수기 대상 문광부장관상 ,경기광주예술공로상 등 수상, 시집 : <꽃굿><『헛소리 같지 않은 뻘소리라고 누가 그래?> 소설집: < 군남여사 나셨도다> 외 동인지 다수 등 (현)송운당하경서재(유튜브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