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기간을 교직에 종사하다가 퇴임할 때 어찌 감회가 없겠는가. 혈기방장한 나이에 강의실에 들어서니 나보다 연상의 학생이 없지 않아 당황스러움 마저 느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정년퇴임이라는 사령장을 받고서는 40년 세월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쳤다.
사실 나는 어릴 적 꿈을 갖지 못했다. 더욱이 내가 대학교수님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 어쩌다 보니 교수가 되었고, 1980년의 대학민주화에 연루되어 해직교수가 되었을 때 나의 교수생활은 그것으로 끝나는 줄 알았다.
1987년 사회가 민주화 되면서 나의 교수생활은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운명 아니겠는가.
내 나이 또래의 사람들이 어릴 적 고생하며 컸다는 것은 그리 내세울 일도 아니다. 그 시절은 너나 나나 대부분이 어렵게 살았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나의 경우는 조금 심했을 뿐이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1년을 부모님을 도와 가사노동에 종사했건만 다음해에도 중학교 진학을 허락 받지 못해 스스로 찾아 간 곳이 그 시절에 있었던 ‘고등공민학교’였다.
선생님들은 월급이 없는 봉사개념으로 오신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따라서 4년제 대학을 졸업하신 분이 거의 없었다.
그 중에는 인근 농고를 졸업하신 분도 있었고, 대도시에서 공고를 나오신 분이 무척 돋보이기도 했다.
1학년을 마치고 2학년에 올라갔지만, 철없는 나의 생각에도 배고픈 설움에 더하여 암담한 미래는 공부에 대한 확신을 갖기 어려웠다.
우선 먹는 것이라도 배불리 먹는 것이 소원이었다. 궁여지책으로 서울로 가기고 마음먹었다. 당시 유행하던 시골소년의 무작정 상경인 셈이다.
교과서 몇 권을 헌책방에 팔아 기차표를 사기로 했다. 남은 것은 결행날짜 뿐이고, 며칠 동안 부모님 눈을 속이기 위해 공책 한권만 달랑 넣고 학교에 가서 시간을 보냈다.
책도 없으니, 선생님 눈총을 피하기 위해 당연히 맨 뒷자리에 앉아야 했다. 그런데 나의 운명은 바로 이때 바뀌어 졌다.
농고를 나오셔서 영어를 가르치던 김○○ 선생님께서 ‘영어단어시험’을 보인 것이다. ‘가리방’이라 불리던 등사판으로 인쇄한 시험지였는데 한 면은 영어를 한글로, 한 면은 한글을 영어로 적는 시험이었다.
이미 공부에 취미를 잃은 처지였기에, 아는 데로 써서 제출하였다.
그런데 다음날, 담당 선생님께서 다시 수업에 들어오셨다. 출석을 부르고 나서 나를 호명하시더니 “네가 단어시험에서 1등을 했다.”며 극구 칭찬을 하시는 것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심경의 변화가 일었고, 새로운 고민이 시작되었다. “서울 가서 중국집에 취직하는 것보다 공부하는 것이 나을까?” 서울로 가기로 마음은 먹었지만, 쉽게 용기를 내지 못하고 부모님 눈을 속이며 시간을 보내고 있던 상황에서 주저 않는 것이 훨씬 쉬운 결정이었을 것이다.
나는 다시 헌책방을 찾았고 내가 팔았던 책들을 다시 사야했다. 그 후 2년을 다녔고 졸업할 수 있었다.
만약 그때 영어단어시험이 없었고, 담당 선생님의 칭찬이 없었다면 나의 인생은 어떻게 됐을까를 자주 생각하곤 하였다.
아마도 틀림없이 서울행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을 것이고, 당시의 꿈이었던 중국집의 뽀이로 취직하여 철가방을 날랐을 것이다.
하기야 사람의 인생을 어찌 알겠는가. 처음에는 뽀이로 시작했겠지만, 나중에는 어엿한 중국집 사장님이 되었을 수도 있겠고 더 나아가서는 강남에 아파트라도 몇 채 가졌거나 똘똘한 상가라도 가진부자가 되었을 수도….
설마 그렇게 되었다고 한들, 40여 년을 대학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다가 명예롭게 정년퇴임한 오늘의 나에게 비교하면 더 보람 있는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내가 오랜 세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가능하면 질책 보다는 칭찬과 격려를 마다하지 않았던 것은 이러한 내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교직생활 동안 학창시절의 모습과는 너무 크게 변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제자들을 지켜보면서 자꾸만 나의 소년시절이 오버랩 되었고, “어린애들은 열 번 변한다.”는 어른들의 말씀을 항상 가슴에 품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지 않는가.
▲오수열 교수 © 위드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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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수열 교수 프로필]
조선대학교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타이완국립정치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한 후 중국인민대학교 국제관계대학원에서 정치학박사를 취득했다.
조선대에서 법인사무국장, 사회과학연구원장, 사회과학대학장, 기획실장, 정책대학원장, 신용협동조합 이사장 등을 역임하고 정년퇴임하였으며, 민주평통상임위원, 성균관 자문위원, 광주유학대학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조선대학교 명예교수와 한국 동북아학회 이사장으로 봉사하는 삶을 살고 있다